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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타임잡지 등의 세계의 유수 언론들은 금속활자인쇄술이 인간의 역사를 통 틀어서 가장 위대한 발명이었다고 보도하였다. 한 예로, 미국의 유명 잡지사인 타임에서 발행한 '더 라이프 밀레니엄(The Life Millennium)'라는 책을 들 수로 있는데, 이 책에서는 지난 천년동안 세계를 변화시킨 100건의 사건 중 금속활자인쇄 발명을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꼽았다.

이들 유명한 언론들의 글을 살펴보면, 금속활자인쇄술이 인간 문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 영향력이 매우 컸으며 영향을 미친 분야가 다양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 영향력을 알아보려면 먼저 금속활자인쇄술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세계사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서양역사에서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전 형태를 살펴보자. 금속활자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목판인쇄술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출판업자들은 책의 각장을 목판에 하나씩 새겨야 했다. 이 때문에 동시에 한 권의 책만 출판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은 목판인쇄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출판업자들이 다른 책을 발행하려면, 수많은 목판을 다시 파내어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 값은 매우 비쌌고, 부자들과 학자들만이 책을 소유할 수 있었다.

반면에, 출판업자들이 금속활자 한 세트가 있으면 다양한 책을 한 번에 출판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양의 책을 낮은 가격으로 출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책을 사서 보게 되었고, 대중의 새로운 지식을 향한 갈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면서 작가들은 자신의 새로운 생각과 지식을 대중에게 퍼트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종교 개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마틴 루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그 결과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많은 작가들의 생각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많은 변화와 혁명을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활자 인쇄술은 정보를 널리 대량으로 퍼지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금속활자인쇄술은 정보의 대중화를 가속화했으며,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계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 있던 일반 대중들이 정보를 생성하고 퍼트려 나가데 참여하게 되었고 서양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여러 가지 역사사건들 즉,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또한 현대 문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서양 문명에 영향을 끼쳤던 금속활자인쇄술은 그 기술의 발상지인 우리나라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활자 인쇄술은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많이 쓰였지만, 금속활자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정보를 공유하고 퍼뜨리고자 하는 뜻이 담긴 우리 선조들의 땀과 노력이 깃든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영토가 컸던 중국의 경우 목판인쇄술로 책을 찍어 내어도 전 중국에 판매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수익창출에는 무리가 없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목판인쇄술이 발명된 이래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더 많은 책을 찍어내고자 하는 사업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직지심체요절'이다. 직지가 인쇄된 것은 1377년으로 고려 말 시기였으며 인쇄된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절이었다. 직지가 인쇄된 절은 직지의 마지막 장에 있는 문단에서 밝힌바 대로 '흥덕사'였으나 그 위치가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청주시에서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을 하던 1980년대에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에 '흥덕사'라는 절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유물을 연구한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의 발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흥덕사와 같은 청주의 작은 절에서 금속활자인쇄본이 나왔으므로, 아마 중앙관청이나 규모가 큰 절에서는 금속활자술을 통해서도 책을 찍어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같은 추측들을 뒷받침하는 것이 '증도가'가 1200년대에 금속활자술로 인쇄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확인할 바가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금속활자인쇄술이 더욱 빛을 발하며 발전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를 들어서였다. 특히 조선 왕실은 그 가치를 인정하여서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주자소를 설치하고 다양한 주자 즉, 금속활자를 발명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1403년에 만들어진 '계미자'이다. 이후에도 1420년에는 '경자자', 1434년에 '갑인자' 그리고 1436년에 '병진자'가 만들어져서 이 금속활자들로 많은 책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발전을 통해서 책을 더욱 다양한 계층들이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금속활자인쇄술이 우리나라 역사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1446년 한글을 반포한 이후인데, 이때 1447년에는 한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였고 아직까지 이 책이 전해지고 있다. 한글로 된 금속활자의 개발이 한글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활자 인쇄술은 이웃나라로도 번져 갔는데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진 것이 여러 기록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특히 일본에 금속활자술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많은 기록에 명시화 되어 있는 바이다. 예를 들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 장수들은 많은 우리나라의 유물을 약탁해 갔는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의 동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동활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해졌고, 그는 문록 2년(1593)에 조선에서 가져간 동활자를 당시 일본 왕이었던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에게 바쳤다. 이에, 후양성천왕이 이를 사용하여 「고문효경(古文孝經)」을 칙명으로 간행했다는 기록이 「시경경기(時慶卿記)」에 수록되어 있다. 1597년 8월에는 목활자를 새로 만들어 권학문(勸學文)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발문에 목활자 인쇄법을 조선에서 전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인쇄술이 유럽전역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위와 같은 사료들을 통해서 미루어 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우리나라와 서양의 활자인쇄술 발명 이후 역사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지식을 독점하던 계층이 무너지고 많은 이들에게 정보가 퍼져 나가는 구심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금속활자술의 가치는 이 때문에 빛이 나고 위대한 것이 되었다. 특히 현대 문명에 미친 그 영향력 면에 있어서 다른 어떤 발명보다도 원론적인 것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