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 image
 


많은 한국인들이 직지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에 의해서 프랑스인들이 약탈해 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은 1800년대 후반에 많은 서양 국가와 조약을 맺게 되는데, 프랑스와도 1886년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꼴랑드폴라시 사진이 조약을 체결한 이듬해에 초대 프랑스 공식 대표로 꼴랑 드 쁠랑시(Victor Collin de Plancy)가 우리나라에 부임하게 된다. 꼴랑드 쁠랑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도 부임했던 인물로 골동품 수집을 좋아하였다. 그가 어떻게 직지를 수집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이 1901년에 저술한 「조선서지」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으로 보아 1900년경에는 이미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직지는 1911년에 드루오 호텔에서 경매되었는데, 이때 앙리 베버(Henry Vever)라는 골동품 수집가가 직지를 정확히 180프랑에 구입하여서 소장하였다. 앙리 베버의 유품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1950년경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 되는데, 이중에는 직지도 들어있었다.

직지 반환 요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이 직지가 프랑스에 갔기 때문이다. 약탈문화재 반환도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수집되어서 간 직지의 반환은 더욱 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박병선 박사 사진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서고에서 오랜 생활 묻혀 있었으나 이 도서관에서 1967년부터 일을 시작한 한국학 학자였던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박사는 원래 인쇄술 관련 지식이 없었으나 3년간의 연구 끝에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 임을 밝혀내었다. 박사는 1972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도서의해’를 기념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주최하는 ‘책’전시회에 출품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직지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박람회 기간 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책을 검토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