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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지 바로 알기

직지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아시나요?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어떤 유물이고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르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지금부터 직지와 그 가치에 대해서 좀 더 배우고, 많은 분들이 직지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점은 무엇인지 질문과 대답 형식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해요.

Q. 직지의 본래 이름은 무엇인가요?
A. 직지의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서 그 이름을 풀이하면 백운화상이 부처가 한말 중 가장 중요한 것인 직지에 대한 뜻풀이를 고승들의 책에서 가져와 이를 편집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긴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에 종종 ‘직지’,‘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 등으로 부릅니다. 또한, 직지를 ‘직지심경’이라고도 하는데요. ‘경’이라는 말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것으로 직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불경이 아니기 때문에 ‘직지심경’이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입니다.

Q. 직지는 프랑스에 빼앗긴 유물이므로 우리나라에서 반환요청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A. 직지를 흔히 병인양요때 강화도에 있던 직지를 프랑스군이 빼앗아 갔다고 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직지가 프랑스에 가게 된 시기는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보다 몇 십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조선은 1886년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 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에는 초대 프랑스 공식 대표로 꼴랑 드 쁠랑시(Victor Collin de Plancy)가 우리나라에 부임하게 됩니다. 꼴랑 드 쁠랑시는 평소에 골동품 수집을 좋아했던 인물로 어떻게 직지를 얻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부임시절 수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쁠랑시는 고서들을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고 직지는 골동품상인인 앙리 베베르가 180 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습니다.

Q. 직지가 금속활자본인 증거가 있나요?
A. 직지가 금속활자인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목판으로 인쇄한 책과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차이점이 많습니다. 이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직지가 금속활자본인 증거를 알 수 있습니다. 목판으로 인쇄한 책의 글자는 비교적 깨끗하게 인쇄되며 칼로 새긴 흔적이 보입니다. 반면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글씨가 깨끗하게 인쇄되지 않으며 글씨에 작은 조각부분이 하얗게 빈 형태로 인쇄가 되어 고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지의 글씨들은 전형적인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므로 금속활자본이 확실합니다. 또한, 직지의 발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직지의 마지막 장에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발행했는지 정확하게 적고 있습니다다. 이 글에 보면 ‘주자’라는 한자를 찾을 수 있는 이 말은 ‘금속활자’라는 뜻으로 직지가 금속활자로 발행되었다는 뜻입니다.

Q.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경은 유럽전역에 성경을 보급하여서 ‘종교혁명’,‘르네상스’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직지가 다른 나라에 영향을 준 면이 있나요?
A. 직지는 당시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을 보여주는 매우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치를 구텐베르크 성경처럼 서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유네스코도 2001년에 직지와 구텐베르크 성경을 동시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금속활자인쇄술을 발명해 내었다는 것은 그 기술을 통하여서 지식을 전파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이 서양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없으나 우리나라 주변국에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고 그 증거인 유물들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활자 인쇄술은 이웃나라로도 번져 갔는데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습니다. 특히 일본에 금속활자술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많은 기록에 명시화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 장수들은 많은 우리나라의 유물을 약탈해 갔는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의 동활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동활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를 당시 일본 왕이었던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에게 바쳤습니다. 이에, 후양성천왕이 이를 사용하여 ‘고문효경(古文孝經)’을 발행하였다는 기록이 ‘시경경기(時慶卿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 인쇄술이 유럽전역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위와 같은 사료들을 통해서 미루어 볼 수 있게 된다.